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 차선에서 달리던 소형 용달차가 내 차 앞으로 급하게 끼어든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를 하니 내 차 뒤에 따라오던 차들도 모두 급정거 하면서 난리가 난다.
“저 XX, 저것도 운전이라고 하는 거야.” 씩씩거리며 내 습관대로 다음말도 내 뱉는다. “으이구 저자식, 평생 용달차나 운전하고 다녀라!” 옆에 있던 아내가 “여보, 두 번째 욕은 너무 심하다”며 내 못된 욕 버릇을 나무라며 눈을 흘긴다. 아내의 그 말 한마디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운전하고 다녔던 차량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간다.
내가 승용차를 처음 구입한 시기는 1984년, 그러니까 군의관 말년차 시절이다. 같이 근무하던 군의관이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가면서 자기가 타던 고물 포니(Pony) 승용차를 나에게 싸게 팔고 떠났다.
그 당시 50만원 주었던가? 하여튼 그 고물 포니에 일가족을 태우고 씽씽 신나게 달렸었다. 에어컨도 없었던 차이니 무덥던 여름에도 창문을 열고 궁생하게 운전했었건만 나에게 있어서 첫차였던 그 포니는 그 시절 외국산 오픈카처럼 생각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고물 포니를 몰고 마치 오픈카처럼 신나게 달렸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러나 그 ‘고물 소형 승용차’ 포니시절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열심히 정비하면서 다녔던 그 차는 결국 1년 후 군의관을 제대할 때, 후배 군의관에게 물려주고 나왔다.
20만원 정도 받았던가? 하여튼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제대하고 대학병원에 들어와 근무하게 되면서 나의 승용차 이력에는 새로운 고물 차량이 하나 더 붙는다. 대학병원에 들어와 몇 개월 동안은 차 없이 출근했었는데, 마침 같은 과의 M교수님이 자신이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바꾸시게 되었다.
물론 차량이 노후해서이었다. M교수님은 자신의 승용차를 새 차로 바꾸시면서 마침 내가 차 없이 다니는 것을 긍휼히 보신 나머지 “자네 이 차라도 탈려나?” 하며 그 고물차를 무상으로 나에게 양도해 주셨다.
차종은 마크(Mark) IV. 나의 추억의 포니와 같은 회사 차량이었지만 소형이었던 포니와 달리 이 차는 중형차에 속하였다. 이차를 타고 한동안은 참 잘 다녔다. 배기량이 커서 부담스러운 휘발유 값을 지출하며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시절이었으나, 포니와 달리 육중히 달렸던 그 고물 중형차의 매력에 휘발유 값은 아랑곳없이 한동안 잘도 몰고 다녔었다.
에어컨도 있었으니 한여름에 오픈카 흉내를 안 내어도 됐었고, 그런데 비록 고물차였으나 잘도 타고 다녔던 마크 IV는 그 운명을 강남구 영동대로에서 마치고 말았다.
잘 가던 차가 그만 영동대로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정지해 버렸다. 응급으로 달려온 보험회사 직원 왈, “이제 이 차는 버리는 게 어떠신가요” 하는 것이 아닌가, 차량 하부의 지지대가 마모되어 더 이상 타면 위험할 뿐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이제 수리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다.
이렇게 나의 차량이력 중, ‘고물 소형차’에서 ‘고물 중형차’로 옮겨 탔었던 마크 IV 시대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 할 수 없이 새로운 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다시 고물차를 탈것이냐 아니면 새 차를 구입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새 차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고물차에 질린 탓도 있었으나 그 당시 월부로 차량을 구입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니 큰 부담도 아니었다.
따라서 드디어 새 차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차는 역시 같은 회사의 ‘스텔라(Stella)’이었다. 스텔라의 배기량은 2000cc, 당시 86아시안게임 개최시절에 공식차량으로 잘도 팔렸던 중형차량이었다.반짝거렸던 새 중형차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던 이 시절, 내 친구들은 거의 소형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물차를 몇 년간 운전하고 다닐 때 그 친구들은 이미 새 소형차를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니 아직 차를 새것으로 바꿀 시기가 안 되었었던 것이었고, 하여튼 새 중형차를 몰고 다닌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어가며 스텔라를 운전하고 다녔던, 지금 생각해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하여튼 나의 신형 중형차 시대는 이렇게 뿌듯한 기분으로 시작되었다.
신형 중형차시대를 잘 보내고 있던 와중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아까웠지만 부득이 스텔라를 중고가격으로 처분하고, 미국에서 이제는 외제차를 타게 되었다. 몇 년도 안 되는 미국생활에서 새 차를 구입할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어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중고 미국차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차는 그 이름도 거룩했던 ‘뷰익(Buick)'. 나의 차량 이력중 ’중고 미제차‘ 시대가 양념으로 추가되었다.
1년 남짓 타고 다녔던 뷰익시절은 연수기간이 종료되면서 귀국과 함께 종지부를 찍게 되어Th, 귀국해서는 다시 새 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차종은 마르샤(Marcia), 배기량은 2,500cc로서 중형차와 대형차 사이에 속하는 차종이며, 전문직들이 많이 타고 다닌다는 판매상의 말에 현혹되어 그때부터는 ‘업그레이된’ 중형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이들도 커가면서 대학입시를 위한 과외공부에 아이들을 실어 나르려니 아내도 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새로이 구입하게 된 차가 대형에 속하는 그랜저(Grandeur). 드디어 신형 그랜저와 함께 내 차량이력은 ‘투(two)카 시대’로 발전 하게 되었다.
차가 필수적인 시대에 웬 소형차, 대형차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나, 어는 사람, 또는 어느 가족의 생활사에서 차량이력이 약간씩 업그레이드되면서 바뀐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임은 분명할 것이다. 해서 나의 생활변화와 함께 해온 차량이력도 한번 반추해 본 것이다.
업그레이된 차를 타면서 이전에 내가 타고 다녔던 차종을 타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약간의 우쭐감이 들었던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그렇다면 나는 대단히 옹졸하고 편협한 눈높이를 가진 사람일터인데, 다행이도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런 마음들이 조금들은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자그마한 결함정도로 치부하려 애쓰고 있다.
용달차 운전사가 내 차 앞에 갑자기 끼어들었을 때, “으이구 저자식, 평생 용달차나 운전하고 다녀라!” 하고 내뱉었던 내 못된 입버릇도 아마도 그런 인간들의 어쩔수 없는 눈높이로 인한 결함 때문이었음을.. “용달차 운전사여!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요즈음에는 SUV 차량을 운전하고 다닌다. 이차는 그 동안 타고 다녔던 차들보다 차체가 높다. 이 차를 타고 다니면 내가 늘 지나다녔던 출근길들, 이를테면 한강다리를 지나며 보이는 정경들조차 모두 새로운 시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를 눈높이로 세상을 바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