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대학생 때였던 시절, 아마 1959년이나 1960년쯤 여름방학 때의 강원도 일주 여행이후, 처음으로 지난 2월 3일부터 11까지 LA여행을 다녀왔다. 근 50년 전의 강원도 여행 때는 속초가는 버스가 이른 새벽에 한번 밖에 없었고, 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그 전날 동대문 밖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여인숙에서 모기에 뜯기며 선잠을 자고, 새벽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도중에 고갯길에서는 승객이 모두 내려 버스를 밀기도 하면서, 속초를 거쳐서 설악산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저녁놀이 번질 무렵이었다. 그때는 술을 채 배우지 못했던 때라, 저녁 먹고 나서는 여관방에 둘러 앉아 하던 “나이롱 뻥”이 오락의 전부였다.
설악산에서 이틀 정도를 둘러보고, 동해안 해변가를 쭈~욱 내려오면서 발걸음 내키는 대로 마을로 들어가 민박을 하면서 해수욕과 관광을 즐겼다. 그 시절의 추억이 LA로 가는 기내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이번 여행길이 그때의 핵심 멤버였던 조풍언과 강세진을 찾아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설악산 비선폭포 근처의 제법 깊었던 폭포 물에 빠져 물밑바닥에 두 번이나 가라앉았던 나는, 우리들 중 유일한 수영선수였던 조풍언 덕에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그때 시퍼렇게 이끼가 끼었던 물의 감촉과, 폭포 물 바닥에 까마득하게 내 머리위로 접시만 하게 밝게 비치던 수면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치곤 한다. 영원한 물 공포증 환자인 내가 해군에서 대령 까지 진급한 것도 우스운 일이다. 오죽했으면 UDT들이 내게 개인교습으로 수영 가르치던 걸 끝내 포기하면서 “군의관님 같은 맥주병은 처음 봅니다”라고 했을까.
KAL기내에서 우리 넷이 한 줄로 앉아서 계속 짜배기 포도주를 마셔 가면서 떠들었지만 끝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별로 가깝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제일 가까운 group이 되어,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게 되었느냐는 거였다. 졸업한 초등학교도 다르고, 대학과 전공도 다 각각인 우리들이 거의 매달 돌아가면서 저녁을 사는 친구사이가 되었는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안한성 : 53회 동창회장도 했고, 우리들 중 가장 무게(?)가 나가고, 아직도 “경기양상블”을 이끄는 경기OB밴드반의 우두머리이고, 동창들 경조사를 빼지 않고 챙기는 의리의 사나이.
김오봉 : 한국일보 견습기자도 하고, ROTC 1기로 군대갔던 때를 빼곤 오늘날까지 가방 하나로 “오봉상사”를 건실하게 꾸려오는 외길의 사업가.
김민식: 첫 직장인 MBC경리부 말단직원으로 시작해서 경리부장, 상무, 전무, 방계회사 MBC애드컴 사장, 대구MBC사장 등 모든 사회생활을 MBC와 함께 한 진국중의 진국인 MBC맨(지금은 MBC사우회장을 하고 있는데 이번 우리 여행에서도 경리를 맡아 알뜰한 살림을 해줬다.)
나 한광수 : 마포 서강 구석에서 1시간 40분을 걸어서 통학하면서도 중․고등학교를 개근한 얌전한 모범생(?) 외과대학을 졸업하고 어울리지 않게 20년을 군대에서 장기 복무했고, 외과의사로 개업 잘하다가 결국 교도소까지 가서 전과자가 되고 의사면허가 취소될 정도로 의사단체일을 열심히 한 얼치기 투사인 의학박사(2000년 의료대란 때는 KBS뉴스에 자주 나왔는데 삭발하고 머리띠 두른 모습이 무서웠다는 LA동문들의 회고)
어쨌거나 도무지 닮은 데라고는 없는 우리들이 조풍언, 강세진과 더불어 자주들 만났고, 지금도 우리끼리는 매달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지난해 9월 마침내 내가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징역형(집행유예)을 받아 의사면허를 취소당하고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가 되니까, 안한성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야, 우리「겉이」(‘같이’의 한성이식발음) LA 풍언이한테 가자. 광수 넌 지난번에 못 갔잖아”했다. 그래서 그렇게 추진된 이번 여행이 그 옛날 학창시절 이후의 첫 “수학여행”처럼 돼 버렸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 Detroit의 강세진이 간암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 우리를 우울하게 했지만, LA로 우리가 가는 대로 Detroit로 함께 가자는 조풍언의 제의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해군에 복무할 때 세계에서 제일 큰 군대병원인 San Dieo 해군병원과, Oakland 해군병원에서 1년 반 동안 근무했던 이래 근 30년 만의 California방문, 멀리 LA야경이 휘황찬란하고 Long Beach까지의 아름다운 해안선이 이득히 보이던 조풍언의 집에서 보낸 마지막날 밤의 만찬, Garden Suite Hotel 에서의 54회 LA지부 동문들과의 환상적인 파티, 20일 전에 큰 수술을 받았는데도 직접 차를 몰고 우리를 안내해 주던 Detroit의 강세진과 또 함께 해준 유효명 동문, 특히 주말을 완전히 우리에게 내주었던 장진동문 내외의 환대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유효명은 아직도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양로사업 등으로 불우한 동포들을 위해 헌신하는 장로님으로서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모태신앙의 Christian으로서 본분을 따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중앙아시아 오지 등에 학교와 교회를 짓는 일로 십일조를 보람 있게 바치면서 여생을 살기고 했다는 조풍언은, 딸이 천주교 수녀인데도 성당을 잘 안 나가는 나의 냉담을 행동으로 꾸짖어 주었다. LA도착 다음날 조풍언․장진 내외와 우리 모두 한인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모처럼만에 많이 정화되는 내 자신을 느꼈다.
이튿날 안한성․김민식과 Palm Springs 에 있는 조풍언의 Palm Desert CC에서 rounding하는 동안 골프를 못 치는 김오봉과 내게 220달러짜리 열기구 관광을 시켜주려던 조풍언의 세심한 배려가 난기류 때문에 열기구 비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어렵사리 골프장까지 평생 처음으로 허겁지겁 cart를 몰로 찾아가서 바로 옆에서 골프 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일도 CC owner 친구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는 경험이리라.
Plam Springs 가는 길 광활한 들판에 수 백 개의 풍력발전기들이 있었는데, 몇 해 전에 왔을 때 안한성은 그걸 보고 “벤츠회사는 참 회사광고도 거창하게 하는 구나”고 생각했단 말을 듣고는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풍력발전기 날개가 벤츠회사 로고를 닮았는데, 발전기 몇 개만 있으면 전기회사에 전력을 팔아 평생을 잘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넷이 초대한 LA지부 동문들과의 「만남의 밤」에서 우리들의 인사말 뒤에 내 18번인 「목로주점」을 시작으로 우리 동문들과 영부인들의 프로급 노래와 춤 솜씨에, Hotel측에 약속했던 10시가 훌쩍 넘도록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었었다.
특히 장병환, 양억석의 환상적인 노래솜씨는 내년 50주년 행사때 꼭 다함께 다시 감상해야만 한다. 몇몇 “음주운전”이 걱정되던 동문들은 무사히 갔을까? 이 글을 쓰면서 그날 밤으로 되돌아가보니 다시금 그때의 따사로웠던 마음이 온 몸에 퍼진다. 단 한 가지 끝날 때 ‘교가제창을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Schὅn ist die Yugend! 아름다워라 우리들의 젊은 날이어. 아 그립구나 화동의 추억어린 날들이어. 내년 졸업 50주년 reunion을 기약하며 Ad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