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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 할아버지 - 정동철 (정동철 신경정신과 의원장)
성인병뉴스 2008-02-21 오후 2:26:00
“할아버지, 바보지?”
“아니에요.”
“지희가 그렇게 일러주는 영어를 따라하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데 바보가 아니고 뭐야?”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귓가에 유리알처럼 티 없이 굴러오는 모습, 아니라고 몽당거리는 손녀의 말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바보가 아니라는 지희의 마음을 모르는 바보, 그게 바보 할아버지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이상한 영어」라는 것이 발단이었다.

사실 나는 바보라는 울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영어 때문은 아니다.
“할아버지 영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상해요. 우리말로 하셔도 되는데… 이상해요.”
그러고 보니 둘째 손녀만의 얘기가 아니다.

실히 10년은 됐지 싶은데 어느 훗날 이모부의 영어는 우긴다며 처조카(여대생)와 그의 아버지 목사이자 교수인 막내동서가 깔깔거리며 웃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시애틀에서 모처럼 온 아래처남의 큰딸(대학생)과 마침 부산에 살고있던 막내이모 딸이 합세하여 다소 낡은 설악관광호텔에서 아내와 함께 여름휴가를 즐기다온 후의 얘기다.

고모부라고 부르는 미국태생 2세와 이모부라 부르는 목사의 딸과 경내에서 난생 처음 대하는 거대한 불상을 보는 미국시민권자인 처조카의 호기심에 어눌한 영어로 설명하며 또 이런저런 일상을 떠들던 얘기들―나는 예외없이 이런 경우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석에 열중하는 경향에, 대해 이모의 딸과 그 아버지가 유난히 웃긴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호주에 2년인가 안식년을 이용해 살았기에 영어가 제법 능숙했다. 정작 시애틀에 있는 처조카로부터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하여간 영어가 주제로 되면 당연한 평가라고 인정한다.

문제는 둘째 손녀가 한 말을 듣고 이모부와 그 딸 사이의 웃긴다는 지적이 겹치자 번진 생각들이지마, 혹시 나의 엉터리 영어로 모처럼 배워온 어린 손녀들의 영어가 오염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한참 뒤에 불쑥 떠올랐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형광등이라는 얘기다.
더 헤집고 속내로 들어가면 늙은 나이에 아직도 뭔가를 내세우려는 자만심, 과장된 거드름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여겨서다.

사십년 전 하와이에서 잠시 버벅거리던 영어체험으로 떠들었으니 드는 쪽에서 보면 대학생이든 어른이든 가관이며 손녀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한 영어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솔직히 영어회화는 늘 자신이 없었다.

영어라면 주눅이 들 정도여서 나서지 못했고 술을 좀 마셨다하면 주절거리는 것이 영어였으니 그야말로 영어 콤플렉스의 소유자다.
수다스럽지만 조금 더 가필을 하자면 이렇다.

손녀는 습관대로 영어가 편했기에 뭐라고 말하곤 했다. 놀란 것은 스토리 메이커로―캐나다 교육이 그랬다는 것인데 내 서가에 아무렇게 놓인 제주도 하루방과 할망을 이리저리 옮기며 혼자 어찌나 신나게 능란한 영어로 얘기를 엮어가는 지,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해서 대답을 영어로 해야 잘 알아들을 것만 같았다.

영어를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그게 모두 엉터리라는 것, Yes나 No에다 OK정도 써도 될 것을 뭐라고 떠벌이니 예외 없이 빗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르고 나불댄 것이다. 손녀는 답답한 한국어로, 나는 엉터리 영어로 급할 때마다 나누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1학년, 1년간 밴쿠버생활의 결과지만 대견한 손녀 앞에 실로 기이한 모습을 보인 셈이다.

며칠 있으면 다시 떠나야할 손녀들, 아침에 둘만이 탈 수 있는 차로 각각 드라이브를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부모와 부모가 묻힌 선산을 끼고 있는 호수를 돌아온 것이다. 아주 조용한 길, 뚜껑을 열고 음악을 들으며 둘만의 얘기를 신나게 나누면서 한껏 웃을 수 있었다.

그들의 귀국 소감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그러나 한결 같이 슬프다는 것이다.
“즐거워요. 정말 좋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할아버지? 근데 슬퍼요.”
이유는 캐나다로 다시 가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울컥하는 마음, 눈높이가 다른 두 손녀―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 에게 같은 뜻의 얘기지만 높낮이를 달리 말해 돌아온 반응은 모두 같은 반응이다. 내가 물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소감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슬픈 캐나다로 가야하는 이유는 모두가 영어 때문이지만 요컨대 그들의 아빠와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얘기 끝에 영어가 그들의 인생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 동의했고, 기왕에 시작했으니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 또한 그들의 각오라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첫째 손녀의 각별한 노력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첫째 손녀와 나눈 얘기는 한결 어른스러웠다.
“이상한 할아버지 영어 말이야, 그 때문에 우리 손녀들 엉어 망가지는 것 아닌가 걱정될 때가 있는데… 그래서 영어를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린 할아버지 때문에 더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요.”

사실 그들 자매가 뭔가 반사적으로 표현해야하는 형편이 되면 빠른 영어가 쏟아진다. 그 말을 들을라치면 관계대명사와 전치사가 너무나 분명하다. 도대체 1년의 결과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며느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늘 옆에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엄마는 여기서 영어강사였다. 안면의 감정표현근육의 그 구조와 기능에서 한국어와 영어사이에 발달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철저한 조연(助演)으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때문에 그녀의 딸들은 영어에 더 익숙해졌고 동시에 더러는 시어머니인 아니애게 다소 섭섮한 인식을 주기에 족한 침묵으로 이어졌다. 결코 주연(主演)으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한다.

들어보니 이유가 타당했다. 그곳 대부분의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 자신들의 자녀가 구사하는 영어를 자랑하면서 장차 귀국했을 때 수준차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말들을 들을라치면 그것이 얼마나 과장된 것이며 왜곡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며느리는 인내와 조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 싶다.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고맙기로 그지없을 따름이다.

내친김에 어차피 할아버지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나눈 얘기를 확실하게 적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할아버지 있지요.”
“네!”
“할아버지 요즘 이런 마음으로 살 때가 있어요. 사람들 보면서, 많이 힘드시지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무엇을 함께 할까요? 웃으며 속으로 말하며 살고 있지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그러니까 우리 손녀들이 꼭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 마음으로 살던 할아버지라는 것, 그것을 기억해 줄 수 있으며 좋겠다는 뜻일 뿐이에요.”
“알겠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마음을…”
곁들인 말 또한 큰손녀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어였다.

God gives every bird it's food, but he dose not thraw it into the nest. (하느님은 새들에게 먹이를 주지만 둥지에까지 넣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저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자랑할 수 있는 손녀, 그런 손녀가 되어,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게 말이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언제나 꼭 건강하셔야 되요. 네?“
「꼭」이라는 단어에 유별나게 들어간 힘을 느기며 지난 해 추석 때 선물꾸러미를 도와준 또래의 옆 동 소녀를 통해 다녀갔던 천사같은 나의 손녀들, 그때 그 소녀를 아직도 보지 못해 늘 두리번거리고 있지만 마음은 그때의 결심 그대로이나 행동이 따르지 못해 빚진 마음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래저래 생각뿐 할 일을 해야 할 때 못하는 바보 할아버지! 결코 영어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정제되지 못한 찌꺼기를 끼고 사는 할아버지.―
힘드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함께 해 드릴까요!
지난 해 「부리망」 때문에 스스로 봉한 입이라 새벽 산책길에 스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웅엉거리고, 실제로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마음, 그러나 그렇게 작정한다는 것이 너무 어정쩡하니 정말 바보 같다.

알라딘 램프도 아닌 터에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을 도와주겠다고“ 주인님이라니” 누구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인가? 막상 알지도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세상에서 해야 할 말, 그리고 할일들을 못하는 직무유기상태에 있으니 말이다. 바보 할아버지, 그래서 나는 영락없는 바보인 것이다. 왜곡된 자부심? 아니면 짜깁기?

여름에 다녀간 손녀들, 하늘을 볼라치면 조잘거리던 소리 귓가에 있고, 눈을 감으면 와락 달려들지만 날마다 보내는 마음 참고 살자니 바보 할아버지는 그저 바보, 어쩌면 애써 뭔가를 남기겠다는 속된 흔적들이 얼마나 정직한가. 역시 영어 때문이 아니라도 검증이 궁할뿐 결론은 결국 바보라는 것이다.
―바보 할아버지!―
(2007.8)

- 정동철 (정동철 신경정신과 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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